희망을 향해 홈런 볼을 날린 에티오피아 최초 야구단 'HOPE'

세상을 바꾸는 KOICA

 

 

 



벌써 6시간째. 아디스아바바의 LG-KOICA HOPE TVET COLLEGE 잔디밭에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던지고, 치고, 달리기를 반복 중인 열다섯 명의 소녀들이 있다. 점심 때가 훌쩍 지났는데도 그들은 에티오피아 산양 왈리아(Walia Ibex) 마냥 폴짝폴짝 힘차게 잘도 뛴다. 땅에 슬라이딩은 또 얼마나 자주 했는지, 밝은 비둘기색이던 유니폼은 어느새 테라코타색으로 군데군데 얼룩졌다.


“Ten times!” 한 선수가 훈련 중 잠시 딴전을 피우는가 싶더니, 어김없이 김윤호 감독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지명된 학생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맨땅에 손을 짚고 흐트러짐 하나 없는 정자세로 팔 굽혀 펴기 10번을 해낸다. 칭얼칭얼 군소리 내거나 원망을 할 듯도 싶은데, 얼굴에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묵묵히 벌칙을 수행한다. 야구 불모지인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 맨 처음으로 야구를 하고 또 전파하려 노력 중인 선구자들답게, 패기가 넘친다.




여성이 야외에서 땀을 흘리며 운동을 즐긴다는 건 매우 보기 드문 일이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그렇다. 더군다나 딱딱한 공을 던지고 무기 같은 방망이를 휘두르며 뛰는, 사내들이 하기에도 꽤나 거칠 법한 운동을 여성이 한다는 건 정말이지 생경하다.
매주 일요일, 에티오피아 한인 야구팀과 친선 경기라도 할라치면, 이를 구경하려는 현지인들이 몰려들어 운동장을 에워싸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제가 LG전자 에티오피아 지사장으로 부임해 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 야구단을 창단한 초창기 때만 해도, 야구공에 맞아 겁을 집어먹고 울음보를 터트리던 녀석들이었는데… 이제 제법 야구 선수로서 모양새가 갖춰졌네요. 제가 3년 치 주말을 모두 반납해가며 훈련시킨 보람이 있습니다. 행여 팔불출 소리라도 들을까 말을 아끼지만, 사실 우리 아이들은 일반 여학생들과는 달라요. 선수 중 11명이 졸업생이고 모두들 직장을 다니는지라 가끔 찾아가 일은 잘하고 있는지 체크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상사들이 칭찬 일색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야구를 하지 않는 타 직원들에 비해 정신력과 태도가 월등하다고 말이죠. 사실 놀랍지는 않았어요. 괴롭고 고된 훈련을 참고 견뎌낸 장본인들이니까요. 저는 우리 아이들을 믿습니다. 강한 체력, 정신력 그리고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기에, 앞으로 살면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극복해낼 수 있다는 걸요.”



“전 팀원 중 키도 가장 작고 말랐지만, 모든 팀플레이의 상징인 유격수(short stop)예요. 백업 플레이, 협력 플레이를 하며 수비에 온 힘을 쏟느라 연약해 보이는 제 두 다리, 양팔, 그리고 커다란 두 눈은 잠시도 쉴 틈이 없죠. 야구를 왜 하냐고요? 세상에, 야구보다 더 재밌는 건 없으니까요! 신기한 건, 하면 할수록 그 재미가 점점 증대된다는 거예요. 얻는 것도 많고요. 야구를 하기 시작한 후 지금까지, 저는 많은 걸 습득했고 이를 통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시간에 대한 제 관념은 180도 변화했죠. 1초 안, 혹은 1분 안에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야구를 하며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큰 변화. 정말 놀랍지 않나요? 예전에 경기 중 손가락이 부러진 적이 있었어요. 그 때문에 한 6개월 고생했죠. 네 맞아요. 잦은 부상에,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고역이고, 새로 시작하고 싶은 분야의 공부도 야구와 병행할 자신이 없어 후일로 미뤄둔 상태지만… 단 한시도 야구를 관두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든 적은 없지요.”



“그거 아세요? 에티오피아에서 야구 역사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사람은, 남성이 아닌 저희 여성이라는 걸요. 전 세계적으로 야구가 남자 운동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또 에티오피아에 남존여비 사상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걸 고려했을 때, 여성 야구단의 발족은 나라를 들썩일 만큼 제법 놀라운 행보였습니다. 때문에 저희 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에티오피아에 야구라는 새 스포츠를 계속해서 알리고 전파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야구를 합니다. 제 포지션은 투수예요. 그런데 김윤호 감독님께서 종종 ‘투수는 모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셔서 더욱 어깨가 무겁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저는 팀을 이끌어 가야 하는 주장이기도 해요. 항상 모두를 서포트하고, 좋은 팀워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죠. 가끔 책임감에 힘이 들 때도 있지만, 야구는 가능한 오래 할 겁니다. 저에게 야구는 단순히 하나의 운동 종목이 아니니까요. 야구는 제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또 업무에도 더 집중할 수 있게 도와줬는걸요. 제 정신력이 어느 정도로 강한지 가늠이 안 되시죠? 저는 회사 내 부서에 오직 한 명인 여직원인데, 거친 남자들과 부딪혀가며 일할 때 전혀 기죽지 않습니다. 그들보다 뒤처지는 일도 없고요. 그런 자존감, 자신감, 정신력. 모두 야구로부터 배웠답니다.” 



“저는 야구를 사랑해요. 야구를 하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다친다 해도 겁나지 않아요. 한번은 경기 중 플라이 볼이 왔는데 공에만 집중하고 서로를 못 봐, 캐처와 심하게 부딪힌 적이 있었어요. 상대 선수가 헬멧을 쓰고 있었던지라, 제 이마가 많이 찢어졌죠. 갑자기 ‘꽝!’하고 피가 많이 났던 것만 기억나고 그 후 기절해서 다른 건 몰라요. 감독님이 저를 둘러업고 병원까지 뛰어가셨다고 하더라고요. 깨어보니 이마 봉합 수술은 이미 끝났고, 전 그저 야구를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답니다! 얼굴에 상처가 나다 보니 부모님은 걱정하셨지만, 어떤 일이 닥쳐도 제가 야구를 그만두지 않으리라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어요. 결국 제 설득에 못 이기는 척 허락해 주셨고, 이제는 저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셨죠.”





글 서혜원 ∥ 사진 한상무